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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말

어느 해에 무엇을 했는지 모조리 기억하진 못한다. 삶을 돌이켜볼 땐 일종의 팻말이 꽂혀 있는 때만 기억난다.팻말의 색이 다채롭고 숫자가 많을수록 풍성한 삶일 수 있겠다. 신산하고 고단한 인생살이일 수도 있겠고. 유년기. 몇몇 에피소드가 있지만 사건이랄만한 일은 아니다.십대.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이 있었고 성인기까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지만 더는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데 유의미하게 언급할만하진 않다.이십대. 돌이킬 수 없는 과오이나 후회하지는 않는 뚜렷한 첫 번째 팻말. 의도하지 않았으나 내가 축적시킨 성과에 대한 결과로 인생의 방향이 정해질만한 사건, 두 번째 팻말.삼십대. 의도해서 축적시킨 성과에 대한 결과로서 세 번째 팻말. 세 번째 팻말로 시작된 몇 차례의 성과로서의 팻말들. 음... 너무 적다..

일상 2024.11.19

다대포해수욕장 카페 뱅가

지난달 다녀온 부산여행 중 가장 좋았던 카페, 뱅가.끝내주는 하늘에 뜨끈한 볕, 고운 모래, 맨발로 찰박찰박 포말을 밟으며 줄줄이 걷던 사람들, 집으로 돌아갈 기차를 타기 전, 마냥 시간을 보내던 오후.커피맛 좋고, 뷰 좋고, 인테리어 감각이 굉장하다.옥상도 있어서 가볼까 했는데 볕이 워낙 뜨거워서 창으로만. 화장실마저 분위기 있고 ㅋㅋ 청결했다.그럼 다 됐지...부산을 또 가면 꼭 다시 갈 곳. 다대포해수욕장에 돗자리 펴놓고 파라솔 꽂아두고 한참을 바다보기하고는 뱅가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우리 동네 있었다면 매일 갔을 텐데... 저 자리에 앉아 작업하고 싶다.아.. 부산 한달살기를 다대포에서 해볼까? 영도엔 해양박물관 도서관이 있고 다대포엔 뱅가가 있고.영도냐 다대포냐....

리뷰 2024.11.18

밑작업들

누군가 에 있는 내용 중 일부를 소개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몰입이라고 했다. 흔히 한 가지 일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를 몰입이라고 하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런데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런 게 몰입이라면 나는 몰입에 특화된 사람이다. 대본 작업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도토리를 모으기 시작한다. 마구잡이 인풋 시기다.부러 관련된 책을 읽고 필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절반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뭘 보든 읽든 만나든 듣든 모두 '현재' 내가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와 연관이 된다. 늘 밟고 지나간 하천의 돌다리도 주인공이 발을 헛디디고 그로 인해 누군갈 만나게 되는 스토리로 이어지고, 영화 속 1초도 채 되지 않게 스쳐간 가게의 간판에서 주요 사건의 배경을 궁리할 실..

일상 2024.11.17

넷플릭스 미드 <나이트 에이전트>(스포o)

미드, 10부작, 넷플릭스 제작자 숀 라이언 동명의 원작소설 -영웅의 여정 플롯으로 짜였다. 정의로우나 결핍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걸맞지 않게 부당한 자리에 놓여 있는 주인공. 운명의 부름(한 통의 전화)을 받음으로써 능력을 발휘하고 결핍을 해소할(아버지의 진실을 밝힐) 가능성을 향해 여정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력자들을 잃기도 하고,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미션을 성공한다. 끝내 영웅의 면모를 스스로와 세상에 떳떳하게 알리고 진실을 획득해 결핍으로부터 성장한다. -전형적인 젊은 백인 남성이 주인공인 것은 상업성을 위한 계산적인 캐스팅이었겠지만, 인종과 성별 분포를 고르게 하기 위한 노력은 분명하게 보인다. 일단 미국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여성 대통령 캐..

리뷰 2024.11.16

바람

할 일이 많을수록 외롭다 안부를 묻는다거나 생각도 안 해본 이야기를 듣는다거나 박장대소한다거나 그런 순간들을 잠시 떠올린다 지나가는 것과 끝나는 것은 다르다 모든 지나가는 것은 끝난다 모든 끝나는 것은 지나가지 않는다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싶다 가끔 소리내어 웃으면서 눈을 맞추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적당히 놀리고 적당히 배려하고 적당히 집중하는 이야기들, 그런 순간, 그 자리에 있고 싶다 한마디씩 추임새를 거들다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마주친 일행과 우리가 지금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눈웃음으로 교감하고 싶다 술 깰겸 찬바람 부는 거리를 걸어 주차장으로, 전철역으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면서 오늘을 아쉬워하고 싶다 지나가는 시간이 끝나갈 때 끝난 시간이 지나가고 있음을..

일상 2024.11.15

밤산책 밤러닝

생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드러누워 미드나 보고 싶은 욕구를 꼴깍 삼키고 걸으러 나온 산책길 어쩐지 힘이 솟아 씩씩하게 뛰고 만다 조금씩 뛰는 거리가 늘고 있다 3년 전, 수술을 마치고 온몸이 상한 채 처음 걸으러 나온 날, 십분을 채 걷지 못하고 가쁜숨을 내쉬며 쓰러지듯 벤치에 주저앉았었다 걷는다 매일 걷는다 그걸 해낸 것만은 잊지 않는다

일상 2024.11.14

외로움과 불안의 관계

-인간은 일기장에도 거짓을 쓴다고 한다. 언젠가는, 누군가는 읽을 수도 있으므로.그렇다면 일기장의 주인을 특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진실해질까?쓰는 순간 쓴 내용을 스스로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만약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면 익명이 보장될 때조차 진실을 쓰기 저어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일기장엔 뭘 써야 하나?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진실만이 가치있을까? -이곳에 며칠 동안 글을 쓰면서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일기장보다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티스토리는 정말이지 아무도 읽지 않는다.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정보성 포스트로 꾸준히 데어터를 쌓아둔 블로그가 아닌 신생 블로그는 완전하게 고립되어 있다. 간간이 달리는 댓글들이 이 고립을 더욱 확인시켜준다. 그들은 블로그를 사용하는 인간으로서 글을 읽는 ..

일상 2024.11.13

한 번 무너지면 와르르

일상의 루틴도 호르몬에겐 장사없다 생리 사흘 전, 운동과 식단, 심지어 일까지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한심해서 누워 있는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일으키지 않는다 호르몬탓을 하지만 그렇다고 매달 그랬던 것은 아니라 내 선택인 것이다 먹던 시간에 먹지 않으면, 먹던 양보다 더 먹게 되고, 먹던 양보다 더 먹으면, 몸이 무거워서 하던 식후 운동을 덜하고, 운동을 덜하고 식사는 더했으니 이미 조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그러면 이렇게 된 바에야 더 먹기로 하는데 그럴 때 먹는 것은 꼭 치킨이나 과자처럼 돌이킬 수 없는 초가공식품이다 그러고나면 혈당스파이크로 졸음이 몰려오고 잠시 졸고 나면 진짜 하루가 날아간다 꾸역꾸역 일을 해보지만 뇌는 오늘 쉬는 날 아니었냐며 갑자기..

일상 2024.11.12

의미

내가 이 회사를 만나서 얻은 것은, 인생은 내 기대를 무참히 박살낸다는 것이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처절하게 체화하게 만들어주었다. 내 노력과 재능은 대개 그에 응당한 보상을 받았다. 적은 노력과 하찮은 재능은 작게, 많은 노력과 빛나는 재능은 드러나게 대가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엄청난 노력과 최대한의 재능을 발휘했지만,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조직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알게 됐고, 끝내 받아들여야만 했다. 불공평하고 억울하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할 가장 중요한 진실은, 세상이 내 노력과 재능을 알아주어야 할 어떤 이유도 의무도 없다는 거다. 그게 삶이다. 불공평하고 억울하지만 또 다시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 내가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다는 교만이 철저하게 박살나고 자근자근..

일상 2024.11.11

요즘 먹는 것들

1 쇼핑앱에서 명란젓을 보곤 덜컥 1kg을 샀다. 하루에 두 스푼씩 먹고 있는 들기름을 둘러 먹으면 딱 좋겠다 싶긴 했는데, 문제는 내가 백미를 안 먹는다는 거였다. 자고로 명란젓은 백미에 슥슥 비벼 먹을 때 최고의 시너지가 나거늘... 하릴없이 대체제로 삼은 게 삶은 달걀이다. 삶은 달걀도 하루 2개 할당량이 있으므로 소금 대신 명란젓을 얹어 먹게 됐다. 그런데 이 조합, 꽤 훌륭하다. 명란젓의 효능 같은 건 모르겠고 좋은 걸 샀는지 맛있는데다 삶달을 슬라이스해 조금씩 얹어 먹으면 왠지 비주얼도 그럴싸하다. 2 곱창전골은 대실패다. 세 팩을 묶어서 할인해 팔길래 사봤는데 도대체 맛이 안 난다. 찬바람 불면 생각나는 뜨끈한 곱창전골의 미덕이란, 구수하든지 얼큰하든지 기름기가 돌면서 든든하든지 곱창이 실하..

일상 202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