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몰입>에 있는 내용 중 일부를 소개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몰입이라고 했다. 흔히 한 가지 일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를 몰입이라고 하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런데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런 게 몰입이라면 나는 몰입에 특화된 사람이다.
대본 작업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도토리를 모으기 시작한다. 마구잡이 인풋 시기다.
부러 관련된 책을 읽고 필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절반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뭘 보든 읽든 만나든 듣든 모두 '현재' 내가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와 연관이 된다. 늘 밟고 지나간 하천의 돌다리도 주인공이 발을 헛디디고 그로 인해 누군갈 만나게 되는 스토리로 이어지고, 영화 속 1초도 채 되지 않게 스쳐간 가게의 간판에서 주요 사건의 배경을 궁리할 실마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밑작업은 몇 차로 이어지는데, 1차 밑작업을 통해 기본적인 설정을 해놓고는 냅다 1회 대본을 써본다. 무엇이 필요한지 뚜렷해진다. 그러고 나면 이제부터 방대하고도 본격적인 2차 밑작업이다. 관련된 것들을 최대한, 정말이지 깜냥껏 최대한 보고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효율이 좋진 않다. 내가 늘 말하듯 백 개를 채취하면 그중 하나를 쓰는데, 실상은 만 개 중에 하나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은 절대 생략해서는 안 된다. 5시간 안팎의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오롯이 내 대본, 내 세상, 내 이야기에 대해서만 궁리한다. 이 시간 자체가 대본의 힘이 된다.
2차 밑작업 끄트머리에 이르면 지금 이 대본을 계속 갈 것인지 그저 대본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지닌 채 <소재> 파일에 머무를 것인지 정해진다. 정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다. 속칭 겐또가 서는 것이다.
아주 운좋게도 계속해서 대본으로 만들어갈 만하다고 정해졌다면, 2차 밑작업을 바탕으로 다시 대본을 쓴다.
그동안 뼈대는 살아있지만 많은 디테일한 설정들이 변했다. 더 나은 대본으로 완성된다. 이제 3차 밑작업에 들어간다. 더욱 세부적인 사항들을 정하고 그에 필요한 레퍼런스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혹시나 내 이야기와 비슷한 작품들이 있는지 이미 1차 작업에서 걸렀지만, 그럼에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 사이 또 비슷한 게 있진 않은지, 억울하게 표절 의혹이라도 받을만한 한 장면이라도 있는지 체크하면서 한 씬 한 씬을 참신한 대사와 장면으로 바꿀 수 있는지 고민한다.
이 기간 동안 1회 대본은 보통 20-25고 정도가 나온다. 30고가 되기 전에 완고가 된다.
누군가는 이런 작업 방식을 꼼꼼하다고 하는데, 어떤 작가는 정말 꼼꼼해서 이렇게 일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이유가 아니다. 일의 속성 자체가 게으름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천성이 게으른 나는 나를 달래면서 일해야 한다.
오늘 오후엔 여기까지만 하자, 이번주는 이것까지만 조사하자, 이번 달엔 몇 씬까지만 쓰자, 하면서 수행할 미션을 잘게 쪼개야만 겨우 해낸다. 쪼개려면 세세한 항목을 만들어야 하고, 그럼 외려 할 일이 늘어난다. 그래서 꼼꼼해 보인다. 대본을 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뿐만 아니라 하면 좋지만 안 해도 괜찮은 일까지 다 하니까. 이게 게으른 것과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그래서 나도 설명하고 싶지만, 여기까지 쓰면서 이미 기력을 소진해 버렸다.
정말 하려고 했던 말은, 일상에도 밑작업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냅다 하면 될 것을, 오늘은 일단 이만큼 먹고 이만큼 운동하고, 내일 요만큼 늘려서 하고, 모레는 글피는...
스트레스에 지나치게 취약한 인간이라 급진적인 변화를 주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데 이제는... 이 '무리 없는 변화'가 정말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밑작업은 이만하고, 대본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밑작업은 이만하고, 몸에 무리를 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러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