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여느 사람들처럼 나 또한 작가 한강의 작품을 톺아보길 원했지만,
내게 그의 작품들은 무겁고 아파서 재독할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수상을 축하하고 기념하고 싶은 독자로서의 응원이랄까, 의무랄까, 기어이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읽어도 좋을, 어쩌면 그럴 때 더 좋을 짧은 소설을 찾았다.

열림원 / 초판1쇄 2003 / 지은이 한강 그린이 우승우
열림원에서 나오는 '시설 시리즈(시처럼 깊고 산뜻한 그림소설)' 중 세 번째 작품이다.
"주인공 소녀 선이가 일곱살, 남동생 윤이가 네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오빠들과 함께 법당에서 열리는 연등회에 가서 붉은 꽃과 닮은 수많은 연등을 보고 온다. 그해, 윤이 죽는다. 가족은 살아간다. 청소년이 된 선, 절에 들어가겠다 어머니께 말한다. 어머니는 그를 큰스님께 데려다주고 "성불하세요" 합장한다. 선은 절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선은 윤이와 삶과 가족과 깨달음과 자연을 생각한다."
그림을 포함해도 100쪽 남짓한 이야기는 인물의 행동과 외부 사건의 인과를 설명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 달아주는 연가등을 본 것과 남동생 윤이 죽은 것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동생들에게 함부로 손찌검하던 작은오빠가 문득 수굿해지고 공부를 시작한 것도 아무런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 선이 느닷없이 머리를 깎는다 말하고 어머니가 두 말 않고 절에 데려다준 것에도 어떤 심리묘사가 없다. 선은 고요한 절에서 순종하며 법가의 사람으로서 성장해간다. 행자들이 다녀가고 말씀을 듣고 만행을 나선다. 이야기는 작가의 말투처럼 들린다. 조곤조곤 사붓사붓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준다.
인과를 만드는 것은 읽는 자의 마음이다.
인물의 상처와 방황, 인내와 성찰, 모든 것이 읽는 자의 그릇과 품성에 따라 읽히고 해석된다. 그래서 시를 닮은 소설이구나, 이십여년 전, 작가는 마음을 만들었었구나, 고요히 깨닫는다.
시화를 닮은 우승우 작가의 그림 또한 아름답다. 글과 그림이 참으로 서로에게 걸맞는다.
소설의 전문을 단 하나의 문단으로 소개하라면, 나는 아홉번째 장을 꼽겠다.
이하 9장의 전문이다.
나무들이 바라보는 쪽은 언제나 햇빛이 드는 쪽이다. 운동장의 저 나무는 밝은 곳에서 자란 덕분에 둥글고 의젓한 모양새로 가지를 뻗었지만, 그늘에 선 나무들의 가지는 예외 없이 간절하게 휘어 있다. 어떤 나무는 빛 속에서 태어나고 어떤 나무는 그늘에서 태어나나.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잎사귀는 똑같이 푸르다. 그들의 잎사귀는 햇빛을 향해 고스란히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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