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놀랍게도 1롤인 여주 강다정은 주인공의 아크를 갖고 있지 않다!
강다정의 정체성은 '똥차 자석'으로 제시되면서 극이 시작됐고, 2롤 남주 주영도와 아름다운 연애를 유지하면서 극이 종결됐는데, 그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외부로부터 왔다.
강다정이 현재 '고여 있는' 상태에서 자기 의지로 '변화'한 순간은, 주도영에게 어린 시절의 아팠던 기억을 고백하는 장면이었는데, 느닷없이 터뜨린 울음과 종결어미 없이 끊어진 짧은 한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내 목에서 칼을 꺼냈다"라고 비장한 변화처럼 일컫는 순간이기에는 설명으로서도 감정으로서도 부족했다.
썸남의 자살, 그가 살인자였다는 것, 그의 쌍둥이의 등장 등은 강다정의 의지와 어떠한 관련 없이 외부세계에서 뛰어든 것이었고 강다정의 본질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주도영조차 주도영이 설사 정신과의사가 아니었을지라도
한 건물의 3층, 4층에 살면서 부대끼다보면 연애까지는 무난히 갔을 것 같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주인공의 아크는 역시나 또 놀랍게도 ㅋㅋ 3롤인 썸남의 쌍둥이 '이안 체이스'가 갖고 있고, 그 다음으로는 주도영이다.
주도영은 대사 그대로 '회피형' 남자에서 사랑의 두려움을 감수하는 남자로 변모, 성장했다.
그 다음은 진짜 놀라운 건데 ㅋㅋ 15롤쯤 되는... 극중 이름조차 몇 번 불리지 않은 막내 형사가 칼에 맞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면서 16회에 가장 강렬한 아크를 보여준다.
이외에 1) 조조연들의 농담따먹기 장면의 반복 2) 스릴러 파트를 담당할 살인사건의 진실 장면의 반복 3) 이안 체이스가 놓인 상황 설명의 반복 등 몇 가지 아쉬운 점은 '16부작'이라는 극악무도한 국내 미니시리즈 시스템에서 비롯된 고질적인 문제다. 이는 작가의 필력과 하등 상관이 없고 외려 작가가 16부작을 끌고 가기 위해 펼치는 차력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필력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모든 캐릭터들이 거의 동일한 톤의 재기발랄한 말장난과 유려한 말솜씨를 뽐낸다는 점에서 작가의 욕심이 불편하다가도 이 정도로 대사를 잘 쓰면 반드시 뽐내야만 한다는 법을 지키는 준법정신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강다정의 엄마 문미란은 아마도 작가님이 쓰시기에 가장 수월한 캐릭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의 대사에 사실상 작가가 글을 쓸 때 세워놓는 여러 카테고리의 푯대를 세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사상을 있는 그대로 썼기 때문에 가장 수월하고 또 작가의 본모습과 가장 가까울 테다. 문미란이 보여주는 합리성, 도덕성, pc함은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님은 두 주인공의 내레이션에서 주제의식을 담아내느라 큰 공을 들이셨겠지만 그보다 작가의 근원과 가장 닿아있는 문미란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정수다. 대단하시다는 소리다.
까는 것처럼 줄줄 써내려왔지만, 이 심란하고 할 일 많은 연말에 고작 이틀에 걸쳐 정주행할 정도로 재밌게 봤다.
4회를 보다가 중간에 다른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작가님 정말 잘쓰신다고 한 시간을 떠들고서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일단 나라면 절대 십육부작으로는 만들지 못한다고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십육부작을 써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릎을 조아리고 찬양해야 하는데, 주인공의 아크 없이 재밌게 쓴 십육부작이라니, 진기명기다.
휴머니즘은 로맨스고, 로맨스는 휴머니즘이다. 사랑없이 인간 없고 인간없이 사랑없는 법이니까.
아크가 없고 사실상 '특성'도 없는 캐릭터인 강다정이 좋은 이유는, 1회의 힘이다. 정확하게는 강다정이 어떤 인간인지 유년시절을 담은 하나의 시퀀스로 보여주는 데에 완벽하게 성공했기 때문에 이후의 모든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납득시켰다. 나는 진짜 불행을 알고 쓰는 작가님이 쓴 글을 볼 때면 작가라는 직업인으로서의 내 인생이 위로받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불행을 아는 작가님이 쓰는 글이 배우들로부터 선택받고 채널의 선택도 받고 시청자들에게도 선택받는다는 것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방증처럼 느껴지고야 마는 것이다.
좋은 드라마다. 잘쓴 드라마다. 평가가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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