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말에 본 작품들

준잠 2024. 12. 30. 06:04

의도하진 않았으나 이것저것 봤고, 이것저것 보느라 내 글을 목표치만큼 못 썼고, 

그것때문에 자책하느니 인풋의 시기였다고 재빨리 합리화한 후 짧게 기록한다!

 

1. <셜록> 시즌1~4 + 3과 4 사이 유령신부까지

 

몇 년만에 재탕하니 처음 본 것 같고 여전히 재밌다.

셜록의 '죽음쇼'의 전말을 끝까지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서 여러 시뮬레이션을 여러 명의 입을 통해 보여준 건

다시 봐도 재치 있고 영리하다. 도대체 어떤 트릭을 쓴 건데? 라는 질문은 사실상 셜록의 아이덴티티인데,

유일하게 트릭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다 보여줬다. 무책임하기도 한 거지. 

셜록의 대사를 통해 "뭘 그렇게 다 트집을 잡아" "니넨 우리가 뭘 보여줘도 시시하다고 욕할 거잖아"

해버리는 제작자들의 짜증과 투정(?)을 십분 이해하기에... 괜찮다.

 

왓슨이 소시오패스들에게 끌리고 지팔지꼰해서 결국엔 자기만의 행복한 삶 ㅋㅋ 을 찾은 거라는 걸

시즌마다 반복해서 말하는데, 제작자들이 스스로 납득이 되어야하나 싶으면서도 

자꾸 들으니까 그래... 납득됐다.

 

메리의 죽음을 왓슨과 셜록의 연대로 풀어내면서 가장 유의미하게 사용했다.

등장인물의 죽음은 이 정도로는 도구화될 수 있을 때 사용하는 게 맞다.

 

시즌4에 등장하는 유로스는 인정해야 한다. 제작자들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을.

유로스의 인질쇼와 전지전능함은 시청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용도가 될 뻔했다.

유로스가 해낸 모든 일을 해내려면 수십억 원과 수천 명이 필요한 수준이다. 

짐 모리아티와의 5분 면담이 대단하려면 보여줬어야 하고, 유로스의 트릭 한두 개 정도는 공개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동풍이 분다는 메타포가 좋다.

 

2. <스프레드 시트> 영드 8부작

 

개존잼 <IT crowd>의 여주 캐서린 파킨슨이 대차게 망가진다.

매회 첫장면은 그녀의 캐릭터 로렌의 sex씬이다. 대단히 노골적이거나 노출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저게 좋나... 싶은 장면들이다. 

아이 둘을 키우는 싱글맘 로렌은 전 남편과 그럭저럭 지내면서 그의 새 여자친구도 무던히 받아들이고,

대형로펌 변호사로서의 삶도 그만그만 괜찮다.

그녀의 '특징'은 어플로 끊임없이 남자들을 만나 원나잇..또는 원아워.. 정도를 갖고, 그걸 게이 친구 알렉스와 함께

스프레드 시트에 기록한다는 것이다.

23분 남짓한 회당 러닝타임 동안 드라마는 그의 어떤 전문성도, 정서적 변화나 감정 갈등도, 전사도 보여주는 데 관심이 없다. 그는 수많은 1회성 만남동안 더러운 꼴을 많이 보고 지도 한다. 성병에 걸려서 남자들에게 알려주기도 하고, 정사 중에 성기의 무슨... 끈이 끊어져서 구급차에 실려가는 파트너를 보기도 하고 성기 사진을 찍어서 보내는 남자에게 답장하느라 찍은 제 성기 사진을 회사 상사에게 잘못 보내기도 한다.

로렌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캐릭터의 특성을 많이도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절대 빗질하지 않는 듯한 부스스한 헤어스타일, 대체 저 로펌에서 어떻게 일하지 싶은 덤벙거림, 무신경함, 유머가 있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진지하지도 않은 흐리멍텅한 말과 태도가 있겠다.

이건 바꿔 말하자면, 완벽한 외모를 보여주는 데 존재 의의가 있는 반페미적인 캐릭터가 아니라는 뜻이고, 날서고 능력있는 캐릭터로 보이기 위해 텅빈 전문용어를 남발하는 얕은 캐릭터도 아니라는 뜻이고, 특징을 위한 특징을 위해 달변과 독특한 행동, 버릇을 장착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을 보여주는 리얼리즘 캐릭터란 뜻이라서, 로렌은 주인공이고 주인공으로서 사랑스럽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는' 드라마는 처음이라 느낀 바가 많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정말이지 대본에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ㅋㅋ

이래도 드라마로서 재미가 있다는 것.

어떤 주제의식도 메시지도 없고 로렌이 왜 그렇게 수많은 남자를 계속해서 만나는지에 대한 동기와 심리를 전달하지도 않고 주인공은 어떤 면에서도 성장하거나 하다못해 퇴화하는 쪽으로 변화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게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에 끝까지 다 봤다. 수준이 떨어지는 드라마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의 드라마다.

비슷한 러닝타임의 심지어 2부나 더 짧은 <도쿄 제면소>가 메시지를 주는 데 얼마나 주력했는지를 떠올리면 이 드라마가 얼마나 다른지 더욱 선명해진다. 이 충격은 꽤나 오래갈 것 같다.

 

3. <오징어게임> 2

잘 썼다. 인간의 심리를 알고 쓰는 작가의 작품을 오랜만에 봤다. 

시즌3을 위한 파이프라인 작업이든 뭐든 잘 썼다.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노매력에 임팩트가 없는데도 플롯으로 밀고 간다.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꺾냐, 싶은 플롯들이 플롯팅이 뭔지 보여줬다. 아... 잘 쓴다.

 

4. 조명가게

스토리가 없다. 인물들 개인 서사만 있다.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나사가 제자리를 파고들듯 이미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전사가 회전하면서 아래로 파고드는데, 새 이야기가 제시되지 않는, 그러니까 드라마 작법에서 벗어난 드라마로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대개의 평가가 작가의 네임밸류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럴 수는 없겠다.

아주 솔직히는, 스토리 없이 분위기로만 조져도 돼? 열받네? 

그게 제일 컸다. 

+ 이정은은 모든 작품의 킥이 된다. 이정은이 정서적으로 관객, 시청자를 감동시킬 수 없는 역할이 있을까?

그는 키즈모델을 해도 대성할 것이다.

 

4. 영화는 너무 많이 봐서 다는 기억이 나지 않고, 어제 오늘 본 것만.

<플립> 오랜만에 다시 봤다. 어린애들의 러브스토리는 내가 가장 재미없어 하는 이야기인데, 만듦새가 좋다.

정확하게 중간점에서 남주와 여주의 감정이 전복된다.

'단막드라마는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의 지침이 130가지 정도 있다면, 그 중 분명 하나다.

내레이션(시점)이 뒤바뀌는 것도 영리한 구성이다.

여주 캐릭터가 너무나 매력적이라 그가 성인이 됐을 때 얼마나 근사한 인간일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 짧은 이야기의 소임은 다 했다.

 

<데스티네이션> 몇 차례 보다말다 하다 이번에 드디어 다 봤다. 

'죽음' 또는 '운명'의 집요한 추적 자체가 플롯이 된다는 게 놀라운 영화다. 그러니까 끝없이 시리즈가 나왔겠지...

운명의 불가항력과 불가사의를 인간은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등장인물 하나하나 죽어갈 때 죽음의 계획이 완수되는 카타르시스가 등장인물들이 살았으면 하는 응원을 이긴다는 점에서 또한 의미가 있겠다.

데스티네이션2는 무슨 이야기일지 앞부분만 봤는데, 1편의 주제를 아예 대사로 다 풀어주면서 시작해서 속시원했다. 

자고로 상업영화는 친절하고 쉬워야 한다는 할리우드의 교과서라 하겠다.

 

<대디스홈> 1, 2

가족영화, 재혼가정, 크리스마스라는 미국의 최대명절, 유머를 잘 버무리면 이렇게 나온다.

유치하고 뻔하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영화가 좋다. 특히 연말에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