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휴머니즘 소설 <76세 기리코의 범죄일기>

준잠 2024. 11. 30. 17:21

하라다 히카 / 김영주 옮김/ 문학동네/ 2022.11 초판

 

서양에 <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프레드릭 배크만이 있다면, 동양에는 하라다 히카가 있달까. 짐짓 차가운 설정과 배경으로 시작하지만 끝내 뭉클해진다.

이 또한 제목이나 목차(1장 절도/ 2장 지폐위조/ 3장 불법사채/ 4장 사기/ 5장 유괴/ 최종장 살인)의 인상과 달리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소설이다.

 

함께 살던 절친 도모가 사망한 뒤, 주인공 기리코는 심리적인 고립, 경제적인 궁핍, 사회적 소외에 맞닥뜨린다.

그녀가 찾아낸 방법은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범죄를 저질러야 한다.

남에게 폐끼치지 않으면서 교도소에 들어갈 방법이 뭘까.

그걸 찾는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다정하고 합리적이고 사려깊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고도 살아갈 방법이 생긴다. 자기의 능력으로, 또 그의 성품이 만들어낸 결국은 인간관계로.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이게 이야기지. 이게 소설이지, 하는 작품이었다.

이미 올해 결산을 했고, 12월엔 업무에 필요한 독서만 할 예정이었는데,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뽑아든 이 책을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흔치 않은 이런 독서의 경험들이 늘 일에 쫓기면서도 소설을 찾게 만든다.

드라마로 각색하면 어떨까, 궁리해보기도 했지만 첫째, 한국에선 편성될 수 없는 주인공과 소재고. 둘째, 로컬라이징할 수 있는 정서로 만들면 어색하겠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지금은 아닌데... 언젠가는? 

아니면 노희경 작가님처럼 네임밸류가 있는 작가가 밀고 나가줘도 좋겠다.

 

덧: p291. 도모의 살인은... 매일 조금씩 남편을 소금과 설탕, 기름진 음식에 중독시키는 것이었다.

-> 몇 년 전 방영한 임성한 작가님 드라마 속 인물이 떠오른다. 탄수화물살인마라고 인터넷에 떠돌던ㅋㅋ

오랜 세월에 걸친 지독한 살의가 문학적으로 풀어서 설명됐달까. 

일종의 '아이디어'인데, 이렇게 국적이 다르고 시기가 다르게 같은 아이디어가 발현된 것을 볼 때면 늘 흥미롭다.

어쩌면 학대당하는(극중 도모는 평생 남편에게 엄청난 학대를 당했다) 전업주부가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누군가는 떠올릴 수 있는 거겠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