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반지 주운 분, 부디 잘 써주세요.
반지를 잃어버렸다.
약지에 끼기엔 퍽 헐렁하긴 했었다. 그런데 약지에 끼지 않으면 도무지 어울리는 손가락이 없게 화려했다.
18k, 1캐럿 다이아몬드가 당당하고, 옆으로 그에 걸맞게 고급스러운 세공의 큐빅들이 우아하게 박혀있다. 있었다...
어머니 반지였다. 내 돈 주고 살 수 없는 지나치게 값나가는 장신구는 대개 어머니 처녀 시절, 그러니까 외가가 부유할 때 사부작사부작 늘려갔던 것들이다.
십수년 전 물려받아 간혹 기분내고 싶을 때 끼곤 했다.
평생 보물로 간직할 줄 알았다. 혹은 정말로 극한 상황이 되면 팔아서 한동안 연명할 수 있게 만들어줄 줄 알았다.
시세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내 머릿속에서만 부풀려져 있을 뿐 실제로 되팔 때는 이 잃어버린 허망함이 허망해지게 약소한 가격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내게 매우 귀중했다는 것이다.
오늘 유독 흩어진 동선으로 움직였다.
처음 가보는 길로 걸었다. 작업하는 카페까지 걸어서 25분 남짓, 늘 걷는 길이 지겨웠다. 카페 앞에 도착하자마자 싸구려 부츠의 밑창이 뜯어졌다. 진작 버렸어야 했는데 한 번쯤은 더 신어도 되지 않을까, 어리석은 검약정신으로 기어이 그 꼴을 봤다. 그대로 카페에 들어가 몇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곧장 집으로 다시 걸어왔다. 우스꽝스러운 꼴이었지만 나는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고 내 발은 더더욱 보지 않으리라는 확신으로 당당하게 걸어왔다. 신발을 갈아신고 다시 카페로 출발할 때는 조금 지쳤고 빨리 작업을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에 버스를 탔다. 늘 걸어다니다 보니 평소엔 안 타던 번호의 버스였다. 그리고 카페에서 비로소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쯤 지나 손가락이 허전했다. 어디서 흘린 걸까.
반대쪽 손의 약지엔 만천원 주고 산 비즈팔찌의 사은품으로 딸려온 비즈반지가 얌전히 끼워져있다.
인생이 이런 걸까, 소중한 것은 어느 샌가 사라지고 공짜로 얻은 건 끈질기게 남기도 한다.
빠르게 슬픔의 5단계를 겪어나간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아냐, 집에 가면 있을 거야. 아까 잠깐 들렀을 때 내가 무심코 빼놓았을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어디서 없어진 거지.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생기면 안 돼. 내가 가진 것 중 어쩌면 가장 비싼 게 사라지다니. 대체 이 상실이 의미하는 게 뭐지? 그래,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있었을 지도 몰라.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 물건은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게 맞잖아. 이걸 잃으려고, 그래서 더 필요한 사람에게 가려고 오늘 내가 황당하게 길거리 한복판에서 부츠 밑창이 뜯어져 덜렁대며 걷고 모르던 길을 가고 안 타던 버스를 타야 했던 거야. 운명론까지 끌고 들어오며 애써보지만... 결국 나는 잠시 우울해진다. 이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다. 이 일이 일어날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사흘 전 티스토리 블로그 이벤트를 발견하고 십여년만에 블로그를 다시 시작한 걸지도 몰라. 이 감정을 써서 털어내버릴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던 거야, 또 운명을 떠올리고야 만다. 운명은 받아들여야 하잖아?
이렇게 된 이상, 누군가, 정말로 필요한 누군가의 손에 끼워지기를. 또는 팔아서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를. 어딘가 쓰레기통이나 하수구에 떨어져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진 않기를.
바라며 마음이 정돈되길 기다리면서도....
문득 살다 어느날, 내 집 어딘가에서 발견하고는 기뻐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걸 보면, 수용의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한 가지 더 희한한 일은, 몇 개월 전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팔찌는 또 찾았다. 그것도 오늘.
이렇게 반지도 기어이 찾게 되리라고 신이 넌지시 위로해주는 것은 아닐까?
아... 희망이여.
슬픔의 적은 희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