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을 만드는 입문 과정
*소설 등 문학작품이 아닌 영상매체 드라마 인물에 국한해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서술함.
*숫자는 과정의 순서가 아니라 단락을 구분하는 명칭일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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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인물의 속성을 크게 보편성과 개별성으로 나눈다.
내가 선호하는 비율은 7:3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7할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 인물만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을 3할 부여한다. 만약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평범해지고 있다면 경계한다. 개별성이 높아진다면 "이 캐릭터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라는 피드백을 감수해야 한다.
2
여러 인물이 나오는 시리즈 드라마의 경우, 캐릭터 간의 차이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흔히 말하는 '데코보코'다.
열정발랄 주니어와 권태권위 시니어의 버디물을 떠올리면 쉽다. 모든 지점이 대척점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유사점도 차이점만큼이나 중요하다. 상대에게 공감할 수 있는 유사경험이나 고난의 기억도 좋은 장치다.
셋 이상의 주요 인물일 때는 캐릭터성 이전에 역할 자체가 구분되어야 한다.
주로 프로타고니스트, 안타고니스트, 서스펜스 인물로 구상한 상태에서, 플롯의 변화에 따라 맡은 역할도 달라지게 만들면 완성도가 올라간다. 특히 장르물(스릴러, 미스터리, 판타지 등)일 때 더욱 그렇다.
캐릭터성이 뚜렷하게 구별되는지 가장 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같은 상황에서 각 캐릭터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표를 만들면 좋다.
ex) 길에 떨어져 있는 돈봉투를 발견했다. 삐져나온 지폐로 보아 백만원은 족히 될 듯 하다.
A : 주변을 슥 둘러보고 CCTV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먼저 봉투를 밟고 서서 휴대폰으로 이런 상황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검색한다. '점유물이탈횡령죄' 같은 키워드를 보고 잠시 긴장하지만, 당장 돈이 필요하다.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 것이 확실해지자, 봉투를 집어 급히 자리를 떠난다.
B : 냅다 주워서 자기 것인양 주머니에 찔러넣고 걸어간다. 공돈이 생겼다고 자랑하며 술을 마신다.
C : 혹시 주인이 찾으러 오진 않을까, 누군가 집어가는 건 아닐까, 주변을 맴돌지만 자신이 손대지는 않는다.
D : 주워서 경찰서에 가져다 준 뒤, 사례금으로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한다.
E, F, G....
각각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가진 본질적 속성의 유사점이 무엇인지, 조정이 필요한지 등을 세밀하게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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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태어나서 현재 내가 배경으로 하는 시대까지 살아온 여정을 쓴다. -대개의 기획안에서 등장인물 소개는 1인칭이 아니라 철저하게 3인칭으로 작성된다. 그 편이 인물의 여러 양가감정과 그에 따른 모순된 행동, 그것이 플롯에 기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
어떤 부모와 환경이었는지부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인물에 대해 알아가고 만들어가기 위해서다. 문장력에 치중하지 않고 최대한 낱낱이 쓴다.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만들어진다. 태어났을 때의 상황과 부모(로 대표되는 주 양육자나 조력자들)의 성향, 양육방식, 재산 규모 등을 절대로 눙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부모가 인물에게 갖는 감정, 태도, 주로 했던 말, 인물이 부모에게 갖는 그것들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A4용지 12장이 지났을 때 전부 다 바꿔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써야 한다. 모조리.
여기서 곁들여야 하는 것이 연표다. 태어난 연도부터 현재 배경까지 쭉 써놓고 몇 년도에 입학, 졸업, 그 사건을 겪었을 때는 몇 년도, 다른 주요 인물을 만났을 때는 몇 년도 등을 정하면서 채워나간다. 가령, 만들다보니 인물이 1997년에 고등학생이었고, 부모님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 해에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IMF 사태가 이 가정에도 반드시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특정 연도가 현재의 인물에 영향을 미쳐 그것이 스토리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연표와 여정 쓰기는 함께 해나가는 것이 작가가 인물을 창조해내는 가장 빠른 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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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 속 주인공은 제가 느끼는 모든 감정과 제 행동 변화의 당위를 구구절절 서술한다. 그래서 독자는 큰 어려움 없이 곧장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몰입하고 그의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을 납득한다. 서술함으로써 핍진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은 '홀든 콜필드'가 될 수 없다. 드라마는 보여 줘야 한다. 내레이션이 최선의 방법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단히 능숙한 작가가 아니라면 내레이션으로 시리즈물을 끌고 가는 것은 모험에 가깝다.
그렇다면 캐릭터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딱 맞지는 않지만, 인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습관을 부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인물이 어떤 결심을 할 때마다 미간을 확 찌푸리며 이를 악 무는 습관이 있다고 하자. 시리즈 초반에 달리기를 시작할 때, 치킨 한 마리를 다 먹겠다고 호언장담했을 때, 이런 소소한 순간에 습관을 준 후에, 플롯으로 기능하는 결정적 결심의 순간 이 습관이 나온다면, 시청자는 저 인물이 아무런 대사를 하지 않았어도 지금 어떤 행동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물의 행동을 수월하게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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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물은 내가 안다. 그 당연한 진리를 담담하고도 당당하게 말하려면, 정말로 알고 있어야 한다.
영화, 소설, 뮤지컬, 카페 옆자리 수다, 친구가 겪은 일, 사촌의 전남친이 다녀왔다는 곳, 그 어떤 것을 보고 들으면서도 내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 내 인물은 어떻게 했을까, 내 인물이 저 일을 겪는다면, 내 인물의 직업이 저거라면, 내 인물이 다른 인물이 만나는 장소가 저곳이라면...
24시간 몰입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잠들기 직전 내 인물을 생각하고, 눈 뜨면서 잘못 설정한 부분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