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예쁜 사람
나는 요즘 내가 예쁘다.
한껏 단장하고 거울을 볼 때뿐만이 아니라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허름한 실내복-절대 문밖에 입고 나갈 수 없게 해진 티셔츠와 배달음식 고추기름이 군데군데 얼룩진 수면바지-으로 갈아입고, 찬바람에 건조하게 벌게진 뺨으로 문득 거울을 마주칠 때조차 아, 참 예쁘다, 하고 생각한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거나 정말로 예쁜 것은 물론 아니다.
몇 년에 걸쳐 체중 감량을 해서 몸피가 줄어든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예뻐 보일 수가 없는데 나는 왜 이제야, 이럴까?
이제야, 그렇다, 마흔이 되는 생일을 갓 지난 이제야 나는 내가 예쁘다.
평생 나를 치열하게 미워했다.
숱한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외모였다. 뚱뚱하다로는 서운할 거대한 몸, 예쁘지 않은 얼굴. 이런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이라고 비밀단체로부터 지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사람들은 말했다. 살 빼면 예쁠 텐데.
그 말은 명백하게 지금은 예쁘지 않다는 것이었고, 살을 빼고 나서의 내 모습은 아무도 본 적 없기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가정법이었다. 타인의 시선에 상처 받진 않았다. 이미 내가 나를 충분히 찌르고 후려치고 짓밟고 있었으므로 타인이 아프게 할 빈 공간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를 미워할 이유만큼 불행할 이유도 숱했다.
내 불행의 조건을 떠벌릴 정도로 어리석은 시절은 다행히 지났고, 볼썽사나운 자기연민을 전시할 만큼 현재가 비참하지 않기 때문에 숱한 이유들은 그저 숱한 이들이 겪는 상투적이고 전형적이라는 정도로 갈음하고, 여하간 그렇게 많은 이유가 있어도 나는 외모를 최초의 불행 수원지, 발화지, 씨앗, 뿌리 따위라고 믿었다. 믿음의 속성이 그러하듯 이 믿음 또한 불가해한 강박과 비논리의 영역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뚱뚱해서 학원을 못 다녀. 못생겨서 해외여행을 못해, 뚱뚱하고 못생겨서 외로워, 맛집을 못가, 저 옷을 못 입어, 외출할 수 없어, 놀이기구를 탈 수 없어, 취미생활을 할 수 없어, 일할 수 없어...
대개는 가난이 원인이었을지 모른다. 무능과 비겁함이었을 수도 있고, 성격과 의지력 부족 때문이었다고 하는 편이 겸허하게 현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분명 모든 결핍을 지방 과잉과 희미한 이목구비의 안타까운 조합 탓으로 돌렸고, 너무 쉽게 불행했다. 불행을 곧장 비극으로 만드는 데도 익숙해졌다. 그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변화는 성취에서 온다.
변화해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를 해야 변한다. 나는 그랬다.
내가 가진 조건은 똑같았다. 갈수록 더 열악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 삶에서 첫 번째 직업적인 성취를 이루어냈을 때, 나는 그때까지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가장 극빈했고, 가장 아팠고, 가장 외로웠다. 벽지와 장판이 1/3쯤 뜯어진 반지하방에서 역대 가장 더운 여름이라는 해의 한여름을 보내면서 에어컨 따윈 꿈도 꾸지 못해 찬물을 수건에 적셔 몸에 붙이고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이전에 계약하고 해지된 회사에서 개같이 구르면서 오장육부가 상하고 정신적으로 극한에 몰려 있었고, 하나뿐인 친구는 결혼 후 아이를 낳아 가장 바쁜 시기라 내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았다. 나는 내일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고,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통장에 남은 얼마가 끝나면 이제 그만 살아도 될지 모른다는 은밀한 안도가 외려 오늘을 살게 했다.
또 다시 글을 썼다.
그 글이 공모전에 당선됐다.
그 후로 몇 해, 바쁘다고 앓는 소리 할 시간이 없게 바빴다.
몸만 부단히 움직이고 딱히 손에 쥐는 거 없는 분주함은 아니었다. 초고도비만이 되고 합병증을 앓으며 몇 차례 크고 작은 수술을 해야 했고 수면제가 없으면 단 두 시간도 못 자는 일정 속에 성과가 나왔다.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내 결과물들은 난생처음 예금을 들게 해주었고, 이천원 커피와 삼천원 커피 사이에서 가격이 아닌 다른 조건을 우선으로 따지게 해주었다.
나는 여전히 그 끔찍하게 더웠던 반지하집에 살고 있고 값나가는 브랜드 옷이나 가방이 없고 만 원짜리 비즈팔찌를 내 생일선물로 내게 주는 삶이지만, 내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일상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 성공을 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성취를 해낸 덕분에.
너 보통사람 같아 보여.
초고도비만에서 경도비만과 과체중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상태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칭찬-그렇다, 최고의 칭찬이다-에 나는 많은 것을 보상받았다. 배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미처 버리지 못한 자기연민의 찌꺼기인 것 같아 마흔의 품격으로 기꺼이 보상이라고 명명하겠다.
나는 이제 보통사람 같아 보인다. 정말로 보통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발표했다는 사십대 평균 자산과 비교하진 않겠다. 너처럼 뚱뚱한 보통사람이 어딨냐는 비아냥도 못 들은 체하겠다. 지능이 두 자릿수가 아닌가 여전히 찜찜한 의심을 거둘 순 없지만, 적지 않은 독서량으로 모자란 지성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내진 않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런저런 그런 모자람들을 포함해서, 나는 마흔을 맞이했고, 불현듯, 내가 밉지 않았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나를 미워할 시간은 집요하게 찾아내서 마치 종교인들이 기도시간을 지키듯 지켜왔는데, 문득, 마지막으로 그 시간이 언제였는지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어쩌면 그때 나는 내가 예뻤다.
열등감과 교만은 태초에 짝 지워져 세상에 내려왔다.
내 몇 안 되는 장점을 곱씹을수록 치명적인 단점들이 치사하게 머릿수로 밀어붙였다.
결핍과 오점들에 짓눌려 숨을 쉴 수 없을 때면 귀신 들린 자에게 십자가를 들이밀 듯 나의 탁월함들을 울부짖었다. 내 안에서 나는 너무나 흉측하고 동시에 준수했다. 그 모순을 견디는 시간이 세월이 되고 인생으로 남았다고 하는 것이 진실에 가장 가까운 회고일 것이다. 그런데 마흔에 이르고 보니, 다행히도, 또 우스꽝스럽게도 그 모순은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진실 또한 깨달았고,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하는 이치를 그럴 리가 있느냐고 반항하지도, 투덜대지도 않고 수굿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기력이 쇠했다. 나는 그렇게 적당히 나약해지고 동시에 무심해진 나의 평안이, 기어이 예뻐보이기까지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것들을 생각한다. 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잊지 않는다.
가진 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고, 갖지 못한 것은 부단히 애쓰면 가질 수 있게 될 것들이 태반이다.
영영 갖지 못한다면 아쉬워하면 된다.
예컨대 나는 내가 예쁜데, 세상은 아직 그걸 모른다. 아쉽다. 안타깝다.
하지만 아쉬울 게 없는 삶을 우리는 권태라고 부르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아쉬운 채로 남겨두기로 한다.
눈두덩이가 불룩해 어딘가 꺼벙해 보이지만, 쌍꺼풀 진 가로로 길고 큰 눈과
유달리 콧대가 짧고 뻥뻥 뚫린 콧구멍이 들려 있지만, 낮다고는 할 수 없는 코와
숱은 얼마 없어도 반듯하고 보기 좋게 굴곡진 눈썹과
근처에 흉터가 크게 져서 흉터를 보느라 놓치기 십상이지만 선명한 분홍빛에 통통한 입술과
천진한 조카가 이모 얼굴엔 왜 구멍이 났냐고 묻는 모공들이 있지만 트러블은 하나 없이 하얀 피부와
뒤통수 향해 납작 누워 귀걸이를 해도 볼품없지만 붉은 혈색이 건강해보이는 귀와
도끼로 찍어둔 것 같은 목주름이 인상적이지만 큰 머리통을 튼튼하게 받쳐주는 굵고 완만한 목까지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나는 참, 예쁘다.
소박한 밥상에 감사하고 뜨끈한 온열매트에 감동하는 오늘밤,
이런 밤을 지켜내는 한, 나는 앞으로도 예쁠 예정이다.